"두 마리의 돼지가 보내 준 결혼여행"

결혼생활의 위기

2002년 5월 말부터 불어 닥친 월드컵의 열기가 한반도를 진원지로 하여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었다. “오~ 필승 코리아! 오~ 필승 코리아!”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그즈음 21년째를 맞이하는 결혼생활은 생애 가장 큰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내와의 사소한 의견대립이 월드컵의 열기가 더해갈수록, 우리 선수들이 상대방의 골문을 위협해갈수록 갈등도 커져만 갔다. 공을 차 넣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골인의 함성은 우리 부부사이를 부추기는 열렬한 응원처럼 들려왔다. 서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화를 통해 갈등의 골을 메워보려고 몇 번씩 시도해보았으나 오히려 오해만 깊어져갔다.

6월 30일,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4강의 신화를 남기며 월드컵은 끝났으나 부부간의 갈등은 결승전을 향해 가고 있었다. 20여 년 넘게 살아가면서 결혼생활에 별다른 큰 문제가 없었다. 없었다기보다 그 많은 물질적인 궁핍과 개척교회의 척박한 환경에서 오는 문제들을 대화를 통해서 지금까지 원만히 잘 풀어 나왔다. 오히려 다른 부부들이 부러워할 정도였다. 결혼 이후에 찾아오는 온갖 시험들도 때론 날밤을 새워가면서 나누는 대화를 나누며 너끈히 해결하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자주 둘만의 깊은 대화를 갖곤 했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흐를수록 갈등의 골이 오히려 점점 깊어지며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결혼생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절실히 필요하였다. 그것은 결혼기념일 이벤트였다. 12월 5일 결혼기념일, 이 날을 D-day로 잡고 아내의 마음을 풀어줄 이벤트를 혼자서 몰래 준비하였다. 평소에 모아 둔 여러 적립 포인트를 확인하여 보았다. 몇 년 동안 쌓아둔 거라서 꽤 되어 보였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무엇을 준비할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집안 청소를 위해 털조차도 몇 가닥 남지 않은 낡아빠진 몽당 빗자루 대신 진공청소기를 신청해 놓았다. 가사에 대한 아내의 수고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다. 또한 변함없이 사랑하는 나의 마음을 담은 하트 모양으로 장식된 빨간 장미꽃 꾸러미를 인터넷을 통해서 신청하였다. 그리고 막상 여행을 떠나려 하니 번번한 가방 하나 없어서 여행에 쓸 조그마한 가방 하나를 전날에 배달하도록 신청하여 놓았다. 어려운 목회 생활을 하다 보니 가방 하나 살 돈조차 없었다. 그런 후 마지막으로 설악산에 있는 호텔에 1박할 수 있도록 전망이 가장 좋은 방을 예약해 놓았다.

12월 4일. 이벤트는 낮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갔다. ‘최아인’이라는 아내 이름으로 진공청소기가 배달되는가 싶더니, 하트 모양의 빨간 장미꽃꾸러미가 배달되고, 또 여행용 가방이 배달되었다. ‘도대체 웬 선물들인가? 이게 무슨 일인가?’난생 처음 받아보는 선물들, 밖에서 택배직원들이 불러대는 “최아인씨!” 이름에 아내는 영문을 몰라 어안이 벙벙해 있었다. 전날에 세 딸들에게는 결혼기념일 깜짝 이벤트를 미리 귀띔해 주었더니 엄마 몰래 케이크를 준비해 놓고, 안방의 벽과 천정에는 형형색색의 풍선들을 달아 놓았다.

마침 그날은 수요일이었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안방 문을 열자마자 폭죽이 터지면서 결혼 이벤트가 진행되었다. “엄마, 아빠! 결혼기념 축하해요.” “우릴 낳아주셔서 고마워요.” 아이들의 축하소리에 아내는 이내 눈시울을 적셨다. 나는 아내에게 신혼여행 갔었던 눈 덮인 설악산으로 1박2일의 결혼기념여행을 준비했다고 알려주었다. 아내의 눈가는 어느새 눈물로 촉촉이 얼룩져있었다. 나는 결혼생활의 초심으로 돌아가서 아내를 사랑해주고 싶었다. 주위 사람들은 우리부부를 일컬어 오누이라고 할 만큼 얼굴이 서로 닮았다고 했다. 얼굴이 서로 닮은 것을 보니 너무 사랑하는가보다는 말들을 자주 듣곤 했던 것이다. 여행을 통해서 그렇게 서로를 좋아했고, 또한 사랑했던 그 때의 사랑을 회복하고 싶었다.

두 마리 돼지 이야기

언제부턴가 아내는 제대로 된 멋진 여행을 한 번 가고 싶어 했었다. 서울이라는 도시 속에서 개척이라는 어려운 목회생활에 세 아이를 키우면서 살다보니 여행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때로는 숨 막히는 생활을 떠나 어디론가 정처 없이 다니며 시름을 놓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 아닌가. 겨우 여행을 간답시고 여름 피서철이 되면 시골 시댁 어른들 뵙고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이나 하고 온몸에 땀띠를 수놓은 채 돌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귀찮아하거나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의 한으로 맺혀있었다.

어느 날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 멋진 여행 한 번 해보고 싶은 것이 소원이예요.” 생활이 어려운 줄 뻔히 알면서도 여행 한 번 하고 싶다고 어렵사리 이야기하는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너무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활이 어렵다고 하면서도 남들은 쉽게도 여행을 떠나건만 우리는 마음조차 먹을 수 없었다. 가는 곳이라고는 월요일이 되면 아이들 데리고 광화문에 있는 ‘생명의 말씀사’ 서점이나 강남터미날에 있는 ‘엠마오서점’이 고작이었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씩 마시며 신간서적이나 한두 시간씩 뒤적이다가 돌아오곤 했다. 우리는 어느 날 의논한 끝에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 문방구에서 두 마리의 돼지를 샀다. 그 날 이후로 두부사고 남은 돈, 콩나물사고 남은 돈, 차비하고 남은 돈 10원짜리, 100원짜리 500원짜리 할 것이 없이 주머니에 있는 잔돈은 모두 돼지의 몫이었다. 돼지의 몸무게는 어느새 무럭무럭 자라 제법 무거워져 있었다. 출발 당일 아침에 뜯어보니 147,500원이나 되는 결혼여행의 종자돈이었다. 빨간 두 마리의 돼지가 이렇게 결혼의 위기에 사랑을 안겨주는 행복한 돼지가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결혼생활에 20년 만에 처음 갖는 둘만의 여행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설악산으로 신혼여행 가던 날 두 눈이 시리도록 첫 눈이 그리도 펑펑 내리더니, 결혼여행 떠나던 날 또다시 하얀 꽃잎이 되어 우리들의 차창 앞에 흩날린다. 꽃가루를 뿌리듯 도로위에 뿌려진 눈송이들은 사뿐히 즈려밟고 가라고 우리를 손짓한다. 설악산에 도착하니 7부 능선까지 눈이 하얗게 덮여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 채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눈이 멎은 권금성 너머로 이따금씩 햇살과 함께 비쳐오는 해맑은 사랑에 포근히 덮여 우리의 아픔도 회복되어갔다.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가슴속에 응어리 되어 겹겹이 쌓인 오해의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고된 여행길에 피곤하여 깊이 잠든 아내를 묵묵히 바라보노라니 감사하는 마음이 내 마음속에서 뜨거운 사랑으로 솟아오른다. “당신, 지금까지 나와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지난 2005년엔 설악산에 머물렀던 그 호텔에서 돼지 두 마리의 사연을 듣고 결혼기념일에 2박 3일간의 초청장을 보내왔다. 처음으로 갖는 긴 기간 동안의 여행에 우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때로는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닌가? 인터넷을 통하여 여기저기 다녀볼만한 곳을 체크하고 스케줄을 정해 놓았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 아내의 몸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출발할 때는 그래도 몇 마디 이야기도 건네고 재잘대듯 노래도 하더니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내는 점점 힘들어했다. 호텔에 도착할 즈음에는 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동안 혼신을 다하여 전도하느라 피로가 쌓였는지 호텔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줄곧 끙끙 앓았다. 아내를 바라보면 볼수록 마음속 깊이 아픔으로 저려왔다. 결국 2박 3일 동안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의 모습을 옆에서 내내 지켜보면서 호텔에서 머물렀다. 이따금씩 창밖으로 보이는 설악산의 경치만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렇지만 그 사이에 어느새 몸도, 마음도, 사랑도 회복되어 있었다.

호텔측의 배려로 설악산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지난날의 위기를 되새겨 보면서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의 소중함을 새삼스레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아내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아내의 행복이 내 행복이 되는 것이 사랑이리라. 처음에는 서로 좋아서 시작된 결혼생활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필요를 느끼게 되고 나중에는 그냥 있어만 주어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부부의 사랑인가 보다. 두 마리의 돼지 저금통은 다시 한 번 부부의 사랑을 더 깊게 만들어주었다.

휴스턴을 꿈꾸며

가정교회를 알게 된 이후부터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내와 해외에 나가 본 것이라고는 중국 북경여행이 전부였다. 그것도 교역자회 임원을 맡고 있는 동안에 추진하여 노회 목사님들과 3박 4일을 겨우 다녀올 수 있었다. 광대하고 광활한 중국대륙을 옆에 두고, 그 동안 우물안 개구리처럼 살아왔나 보다. 아직 할 일이 이렇게 많이 남아 있는데, 아직 복음전하러 가야할 곳이 이렇게 넓은데도 '방안에만 갇혀지내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이곳 저곳을 지나쳐 갈 때마다 그들 영혼의 신음소리, 울부짖는 소리, 아우성이 들려오는 듯 하다. 여태껏 삶의 굴레에 갇혀서 안주하여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저절로 부끄러워진다. 이래서 여행이 좋은가 보다. 여행은 부부 사이를 더욱 가깝게 해준다. 여행은 좁디 좁은 시야를 넓혀준다. 여행은 편견에서 벗어나게 한다. 여행은 마음을 넓혀준다. 여행은 심신의 건강을 선물한다. 여행은 삶에 여유를 갖게 한다. 여행은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한다. 아직 내겐 해야 할 일이 많고, 살아야 할 이유가 많음을 깨달아 본다.

아내는 세상이 얼마나 넓은 지, 드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죽기 전에 는 꼭 하와이 구경하고 싶다나... 그러던 것이 가정교회 목회자 세미나, 컨퍼런스를 다녀온 후부터는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의 가슴속에는 새로운 휴스턴에 대한 꿈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민국 서울에서도, 우리의 목회 현장에서도 새로운 휴스턴을 세워보고 싶다. 빨리 가정교회의 출발점이 된 휴스턴, 초대교회의 모습을 구현한 휴스턴, 21세기의 기폭제가 된 휴스턴을 속히 한 번 둘러보고 싶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 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그 두 마리의 돼지는 매일 매일 50원, 100원 500원 짜리를 먹으면서 꿈을 키워오고 있다. 아내와 행복한 동행을 위해, 더 멋진 목회를 위해, 주님이 원하시는 그 사역을 위해,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부흥을 위해서 오늘도 돼지 저금통 속에 소중한 꿈을 영글게 할 100원짜리 하나에 믿음을 담아 넣어본다.

하나로교회 신현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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